“농촌으로 돌아가자”는 농활 대자보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학교 게시판의 한모퉁이에 “교향악에의 초대”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문화관 - 지을 때부터 너무 부르조아적이라 하여 수차의 방화 대상이 되었던 - 의 기획 프로그램이며 KBS교향악단이 출연한다고 쓰여 있었다.

공연일이 기말 고사 기간이었기 때문에 15분 전쯤 들어가면 상당히 좋은 좌석에서 감상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연구실을 나섰다. 그러나 1층은 이미 다 차 있었고 2층도 거의 메꾸어지고 있었다.

좌우 통로까지 가득 찬 가운데 시작된 공연의 1부는 4학년 학생이 협연한 생상스(Saint-Saens)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함께 진한 감동을 자아내며 막을 내렸다. 음악에서 채 깨어나지도 않았을 그때 1층에서 꽤 귀에 익은 어투의 외침이 들려 왔다.

“여러분! 진정한 예술이 무엇입니까? 이곳은 이 동수 열사가 분신한 곳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예술은 투쟁입니다. 진정한 예술은 압박받는 민중을 대변해 개조된 세계상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투쟁하는 것입니다”

자기 감정을 완전히 이기지 못한 그 학생의 말끝은 흐려졌고 이어 몇몇 학생들의 지지 박수가 있었다. 또한 “조용히 해라”는 다른 외침도 있었다. 경비원이 만류했는지, 더 이상의 호응이 없어서인지 곧 조용해졌고 자리를 뜨다가 엉거주춤 서서 새로운 예술론(?)을 듣던 단원들도 무대 뒤로 사라졌다.

더 이상의 소요가 없이 조용해진 일화였지만 하나의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만일 이 음악 대신 노동자의 현장 보고, 혹은 민중 예술론에 대한 강연 후에 저런 구호가 있었다면 학생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사실 논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사회 구조와의 관계에서 설명되는 민중 예술론이 훨씬 더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화음을 들었을 때 우리의 감정은, 예술은 투쟁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가?”

음악회는 계속되었고 3번의 앙코르를 주고받는 가운데 교가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가슴을 촉촉이 적신 음악회였지만 공연장을 나올 때는 환속(還俗)을 했기 때문인지 조금 전의 생각이 요즈음의 노동 운동, 학생 운동으로 이어졌다.

사실 학생 운동은 단순히 어느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일본, 미국 등 외세의 개입, 60․70년대의 경제 정책의 폐해로 말미암은 모순, 온건한 이론보다는 급진적 이론에 의한 분석이 훨씬 설득력 있는 우리 현실, 즉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모든 잘못을 제도로 돌리는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발본색원(拔本塞源)은 주도자들을 색출하여 보안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구조악을 극복하며 사회의 진정한 모습을 구현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마치 아름다운 음악이 민중 예술론에 대한 최고의 명약인 것처럼.

이어서, 동일하게 개혁 교회에 속했으나 당시의 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상이한 입장을 취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화란 자유대학의 법학 교수이자 기독교 정당(the Christian Historical Union)의 설립자 A.F.Lohman(1837-1924)은 산업 혁명으로 말미암은 노동자 계급의 비참상에 대해, 이것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하여 A.Kuyper(1837-1920)는 1891년 『기독교와 계급투쟁』이라는 책을 통해 산업 혁명으로 말미암은 노동자 계급의 대두와 혼란 등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자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었다.

성도의 교제는 시공을 초월한다 했던가, 생각은 바울에게까지 날아갔다. 사도 바울은 그 시대의 사회 구조악에 대해 회피하지 않으셨으나 또한 혁명에 의한 해결을 추구하지도 않으셨다.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주인과 노예의 갈등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놀라운 나라를 전파하셨다.

사실 사도의 기초 위에 서 있는 오늘의 교회라면 얼마나 현시대의 도전을 바로 파악하고 있는지, 또한 산 위의 동네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 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