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필자는 이번 가을에 6주의 연구 휴가를 얻어서 화란의 아펠도른에 위치한 화란기독교개혁교회의 신학교에서 아람어와 성경 배경사를 공부하였다. 그 기간 동안에 화란 개혁교회들과 여러 기관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어떤 아펠도른 신학생과 이야기한 것이 귀국 후에도 줄곧 마음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학생과의 만남은 책 전시회에서부터 시작된다.

아펠도른 신학교의 학생회는 학기 초나 학기말이 되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한 책들을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한다. 1길더(약 550원)와 3길더 코너가 있고, 다른 방에는 교과서나 고전적인 책들이 10길더 이상의 가격으로 매겨져 있다. 1길더나 3길더의 책은 먼저 붙잡는 사람이 임자가 되지만 교과서적인 책들은 그 책의 번호 아래에 자기의 이름을 적어 놓게 하고 마지막 날에 주사위를 던져서 새로운 주인을 결정한다. 그런데 책 전시회의 한쪽 구석에는 팜플렛 코너가 있다. 여러 가지 팜플렛과 잡지를 파는 코너인데 1센티미터 두께에 0.5길더로 판다. 필자는 자유 경쟁인 1길더와 3길더 코너에서 필요한 책들을 산 뒤, 팜플렛 코너에서 상자에 담긴 잡지와 팜플렛을 뒤졌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상자들을 뒤지기 시작하였는데, 은퇴 목사의 서고에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어떤 상자 안에는 1944년 화란 개혁교회가 총회파와 해방파로 나뉠 때에 발간된 각종 팜플렛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1944년의 분열은 예정과 언약을 동일시하는 사변적인 신학, 그리고 교회법을 무시하고 총회에서 목사를 파면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신학적이고 교회법적인 문제들과 연관된 분열이었던 만큼 신학적인 논쟁이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매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얀 리델보스(Jan Ridderbos)와 그의 아들 헤르만 리델보스(H. N. Ridderbos), 제아클 흐레이다누스(Seakle Greijdanus), 클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 등 한국에도 알려진 신학자들의 팜플렛도 그 중에 끼어 있었다. 그 당시의 우체국 소인까지 찍힌 팜플렛들을 차례로 고르면서 분열 당시의 열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약 20센티미터의 팜플렛을 추렸고 10길더(5500원)를 지불하였다. 어떤 팜플렛은 후에 다른 책에 수록되었으나 사료를 확보하는 마음으로 다 골랐다.

책을 다 고른 후에 도서관 전산실에 내려와서 전자 우편을 확인하고 있는데 어떤 화란 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내게 화란 교회사에 관심이 많으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의 전공은 구약학이고 교회사는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왜 그러한 질문을 하느냐고 되물었다. 그 학생은 자기의 이름이 릭(Rik)이며 마지막 학년인데 조금 전에 책 판매대에서 내가 화란 교회사에 대한 팜플렛을 조심스럽게 뒤지는 것을 보면서 왜 한국 학생이 자기 나라의 교회 역사에 관심을 갖는가를 생각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제 피할 수 없이 화란 교회사의 팜플렛을 뒤진 이유를 설명해야 하게 되었다. 나는 인용부호를 붙인 “화란” 교회사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하이델베르크 21주일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모든 인류 가운데서 영생을 위하여 선택된 교회를 자신을 위하여 그의 말씀과 성신으로 참된 믿음의 통일성 가운데서 불러 모으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심을 믿”기 때문에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며, 1944년에 화란에서 있었던 언약에 대한 논의는 후대의 주님의 교회들이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 자료를 모았고, 그 논의가 화란에서 있었기 때문에 “화란” 교회사에 관심이 있다고 다소 길게 대답을 하였다. 기대하지 않은 대답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 학생은 더 깊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자기 집으로 청하였다. 그러나 바쁜 공부 일정 때문에 그의 집에 갈 시간을 낼 수 없었고 대신 며칠 후에 학교 휴게실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기로 약속하였다.

약속한 날에 우리는 다시 자리를 함께 하였다. 릭은 화란 사회가 더 어두워지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화란 사회가 배교한 사회가 되었으며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처럼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기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이야기하였다. 확실히 화란 사회는 명암이 극명히 교차하는 사회로 보였다. 여전히 훌륭한 기독교적 유산이 남아 있지만 다른 편으로는 그것이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전에는 주일에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는데 작년에는 일년에 네 번 주일에 문을 열었고 금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문을 열도록 정부에서 결정하였다고 한다. 화란은 금세기 초에 인구의 95%가 기독교인이었고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같은 기독교인이 수상을 지냈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의 출석률이 점차 낮아지고 있고, 동성애나 안락사에 대해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합법화하고 인정해 준 나라가 되었다. 기독교인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연립 내각에서 개혁교인이 한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게 된 현실에서 그는 배교와 촛대가 옮겨지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릭이 배교와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배교는 문화적 현상을 동반하지만, 배교(背敎)란 먼저 믿었던 자가 그 신앙을 버린다는 점에서 불신(不信)과 다르기 때문에 배교의 현상은 불신자를 포함한 사회의 변화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먼저 믿었던 자들이 그 믿음의 도리에서 배반하는 것에서 찾아야 함을 이야기하였다. 배교는 일차적으로 교회적인 현상이지만 또한 그 핵심에는 ‘처음 사랑’이 있음도 지적하였다. 에베소 교회는 바른 지식이 있어서 이단을 식별할 수 있었고 또한 능력도 있어서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낼 수 있었지만 그들이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좋은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지만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처음 사랑이 없으면 주님께서는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이야기하셨다. 따라서 배교라는 것은 교회 안에서 시작된 일이며 핵심에는 주님께 대한 처음 사랑이 있고 결과적으로는 문화적 타락도 동반하는 것임을 함께 이야기하였다.

16세기의 상황에서 보면 중심지에는 스페인과 프랑스가 있었고 화란은 북쪽 구석에 속한 나라에 불과하였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순전히 받아들이고 나왔을 때에 개혁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고 화란 개혁교회를 통해서 주위의 교회들도 함께 큰 복을 누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회가 급속한 세속화를 겪고 개혁 교회의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되는 현실을 보면서 릭은 배교라는 현실을 심각하게 생각한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에베소 교회에 대해 서로 이야기한 것이 다시금 생각났다. 에베소 교회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에서는 그처럼 훌륭하였지만 ‘처음 사랑’을 잃었을 때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셨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었다는 것은 여전히 주님께 대한 사랑은 있지만 ‘처음’ 사랑이 없다는 말이다. 처음 사랑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교회에 대한 관심의 핵심이 ‘언약의 사랑’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으로 삼으셨고 이제 자신의 신부인 교회에게서 사랑의 반응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교회가 순결한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을 때 가장 거룩하신 주님께서는 무한하신 엄위로 대하셔서 그를 버리신다. 비록 아직은 바른 신학과 행위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과의 관계의 핵심인 언약의 사랑이 빠지면 나머지 부분이 세속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이다. 이제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순결한 성읍은 예루살렘처럼 창기의 성읍이 된다(사 1:21). 교회를 무한한 사랑으로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또한 무한하신 엄위로 대하신다는 사실이 연구 휴가를 마치고 다시금 말씀의 봉사를 시작한 필자의 마음에 가장 큰 사실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사진 설명: 필자의 지도교수 H.G.L. Peels 교수(아펠도른 신학교, 구약학)와 화란 개혁교회(해방파)의 캄펀 신학교 도서관에서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