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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00호

 

감독 제도와 개혁교회
김헌수  (독립개신교회 신학교 교장)

독립개신교회는 2009년 8월 29일에 열린 총회에서 헌장을 개정하고, ‘단수 감독제’의 정체(政體)를 ‘복수 감독제’인 ‘의정회’(議政會)의 체제로 바꾸었습니다. 단수 감독제에서 복수 감독제로의 이행은 그 무렵에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초대 감독 시절부터 준비한 일입니다. 독립개신교회 목사들은 1999년부터 장로교 교회 정치와 도르트 교회법을 공부하고 번역하였고 헌장 개정에 대한 논의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치리회(治理會)를 구성한 교회가 없던 그 당시로서는 헌장을 개정할 수 없었고, 치리회를 구성한 교회가 생긴 이후에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독립개신교회의 이러한 발전은 2009년 총회 때에 고(故) 최낙재 목사님의 개회 경건회 강설의 결론 부분에 잘 표시되어 있습니다.
l964년 한 분 목사님의 복음 전파 및 목양과 감독으로 출발한 교회에 주께서 복 주시어 45년이 지난 지금은 네 교회, 다섯 목사와 조사 한 명, 장로 세 명의 교역자와 교직자를 세워 주셨습니다. 주께서 크신 은혜로 독립개신교회, The Independent Reformed Church를 세워 주시고 복 주시어 거룩한 교회로 서 가도록 하시므로, 우리는 출발 시의 믿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하늘에 계신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르려 할 뿐입니다. 다만 한 분 감독으로 출발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 헌장을 감독제로 하고 출발하였으나 주의 복 주심으로 여러 감독을 주셨으므로 이제 그 크기에 맞는 옷을 입혀 복수 감독제를 채택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안녕과 질서에는 아무 변동이 없을 것입니다.

2009년 총회 이후에 독립개신교회는 복수 감독제의 옷을 입고 평안히 전진하여 왔으나 최근에 ‘단수 감독제’가 독립개신교회의 설립의 취지를 바르게 ‘계승’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감독제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생겼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감독과 교회사에서 사용된 감독 사이에는 미세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으므로 두 가지를 구분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1.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감독

1) 감독의 직분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는 ‘감독’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지만, 성경에서는 감독을 ‘찾아와서 살피는 분’으로 제시합니다. ‘감독’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찾아간다’, ‘돌아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라를 찾아가서 ‘권고’(眷顧, 파카드)하시자 사라의 믿음이 강하여져서 아이를 낳았습니다(창 21:1).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眷念, 파카드)”(출 2:25)하여 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출 19:4-6).
신약에서도 ‘감독’한다는 말은 전파된 말씀이 열매를 맺고 있는지를 살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 사도와 바나바는 예루살렘 회의가 끝난 다음에 1차 전도 여행에서 복음을 전한 소아시아 지역의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헬. 에피스코페오, 감독하자)”(행 15:36)고 하였습니다. 전파한 복음 말씀이 어떠한 열매를 맺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바로 ‘감독’의 의미입니다(참조. 히 12:15).
‘감독’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에게 그리고 말씀의 직분자에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이 ‘감독의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자기 백성을 찾아가시기 때문에 말씀의 직분자도 그 말씀을 들고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갔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감독하는 자들을 찾아가지만, 성경에서는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가셔서 구원을 맛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배울 수 있는 감독의 모습입니다.
2) 감독과 다른 직분들: 장로, 목자, 청지기, 인도자
감독이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찾아가서 살피는 자’라는 이 이미지는, ‘감독’이라는 말이 목자나 장로, 청지기, 인도자 같은 말들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다양한 용어들은 감독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풍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말할 때에 그들을 가리켜 감독이라고 불렀습니다(행 20:17, 28). 또한 디도에게 그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가 각 성에 장로를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한 다음에는(딛 1:5),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하면서 가르칩니다(참조. 딤전 3:1). 장로는 ‘나이든 자’라는 말에서부터 나왔고 권위를 표시하는데, 감독과 장로라는 말을 같이 사용함으로써 감독도 장로처럼 권위가 있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둘째, 감독은 ‘목자’라는 말과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하고 말하여서, 감독과 목자로서 ‘치는 일’(牧羊)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감독은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처럼 신령한 꼴로 먹이고 보호하는 직분임을 이러한 표현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는 말씀대로, 목양하는 감독은 겸손히 섬기는 직분입니다.
셋째, 바울은 이러한 감독이 ‘하나님의 청지기’라고 하였습니다(딛 1:7).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은 감독이 스스로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신 주님의 백성을 맡은 직분임을 표시합니다. 따라서 감독은 자기의 고집대로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넷째, 감독은 ‘인도자’라고도 표현되고 있습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고 감독할 때에 그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안내합니다. 인도자는 그의 교훈과 행위에서 성도의 본이 되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들을 인도하는 자의 믿음을 본받습니다(히 13:7, 17, 24).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만 하고 행위는 본받을 것이 없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는 아주 다른 분들입니다(마 23:2-3).
3)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시는 그리스도
감독, 목자, 장로, 인도자 같은 표현들은 모두 교회에 주신 직분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감독’과 ‘목자’를 보면, 이 말이 먼저 그리스도께 적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벧전 2:25)라고 불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감독자가 되셨고,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써 우리의 목자가 되셨습니다. 삯꾼은 도망하지만 그분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요 10:11-12).
4)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에게 함의하는 내용
성경에서 가르치는 감독에 대한 교훈은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바가 있습니다.
첫째, 목자와 감독이라는 직분이 먼저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었으므로, 목사와 장로는 자기 자신의 권위보다는 그리스도의 직분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10) 하신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직분은 그분이 이루신 구속 사역과 관련이 있으므로 직분자도 그 직분의 행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전파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직분자로서 권위를 행사하지만 그것을 통하여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그 대신 직분자의 권위적인 모습만 나타난다면, 그는 직분을 바르게 수행한 것이 아닙니다. 목자로서 양을 돌보는 그 일을 바르게 수행하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삯꾼’이라고 준엄하게 책망하실 것이고 그에게서 핏값을 찾으실 것입니다.
셋째, 감독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의 감독들, 곧 장로들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행 20:30) 하고 경고하였습니다. 감독으로 봉사한 사람도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그렇게 경고한 것입니다. 유능하게 봉사하여 많은 신자의 신망을 얻은 감독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면 오히려 그 해악은 더 클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는 장로에 대한 송사도 받고 그 그릇된 것을 바로잡습니다. 바울 사도는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딤전 5:19-20) 하고 가르쳤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감독의 전형을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가 되신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감독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전하려고 사람을 찾아가고 목자처럼 양을 인도하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가 되십니다.

2. 교회사에서의 감독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직분에 대한 표현과 교회사에서 사용된 직분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감독’이 ‘장로’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감독들’(빌 1:1)이라는 복수형도 나오지만,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조직되면서 직분자들 사이에서도 위계질서를 정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감독은 시대적이고 문화적인 특징이 있고 상당히 복잡하지만, 대체로 고대 교회의 군주적 감독제, 로마교회의 성직 계서적 감독제, 개신교회의 복수 감독제로 나누어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고대 교회의 ‘군주적 감독’(monarchial bishop)
복음이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을 때에 각 도시마다 교회를 세우고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장로 회의’를 구성하였으며, 그중 한 사람을 택하여 ‘감독’이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그 조직 안에서 분열이나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려고, 의견을 청취하고 권면하며 훈계하면서 회의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그러한 제도를 택하였습니다. 그 감독이 다른 사람 위에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동료 가운데 1인자’(primus inter pares)로 봉사하였습니다.
특히 교회가 박해를 받고 이단들이 발호하던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이끌 수 있는 지도자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레나이우스(120/40-200/3?)는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에 직면해서 ‘사도적 전통’은 감독들의 계승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단언하였고, 키프리아누스(200?-258)가 ‘감독 없이는 교회가 없다’ 하고 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감독제는 당시의 세상 정치 체제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왕정이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도 군주적 감독제가 아무런 이의 없이 수용되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대도시가 그 지역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곳의 감독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이러한 감독제는 감독이 군주[王]처럼 전권(全權)을 행사한다고 해서 ‘군주적 감독제’라 부릅니다.
2) 로마교회의 성직 계서적 감독제
교황도 처음에는 로마 교회의 감독이었지만, 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한 이후 정치적인 공백기가 있었을 때에 로마 교회의 감독의 역할이 세속의 영역에서도 증가되다가, 후에 로마 교황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적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교황제가 뿌리를 내렸고 급기야는 교황좌에서 이야기한 내용은 무오한 교의로 인정되기에 이르러 고대 교회의 군주적 감독제와는 전혀 다른 제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감독이 ‘장로회의’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교황-추기경-대주교-주교-사제’ 등으로 이어지는 성직 계서제는 말씀의 봉사와 무관한 조직이 되어 버렸습니다.
첫째, 사도적 계승권을 로마 교황직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류입니다. 사도적 계승권은 사도적인 교훈과 전파에 있고 모든 교회는 그러한 사도적 교훈의 기초 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마 16:18; 엡 2:20). 모든 교회들은 사도적인 진리를 이어받고 이것을 전파함으로써 교회의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처럼 명백한 사실을 무시하고 교황이 사도적 직분을 계승하면서 여러 교회들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 로마교회의 교황제는 직분의 왜곡된 형태입니다. 교회를 ‘가르치는 교회’와 ‘듣는 교회’로 양분하고, 사제들로 구성된 ‘가르치는 교회’ 안에서만 성찬의 포도주를 마시고 평신도로 구성된 ‘듣는 교회’에는 성찬의 떡만 주는 것은 직분의 오용입니다. 떡과 포도주로 표시된 복음을 모든 신자에게 충분히 전하는 대신에 직분자들끼리 포도주를 나누는 것은 그 직분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직분자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인 그리스도처럼 복음의 말씀으로 회중을 찾아가고 심방해야 하는 사람인데, 로마교회에서는 심방 대신에 신부를 찾아오게 하고 고해 성사를 하게 합니다. 그리고 교황이 권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오하다고 하고 신부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신자들이 절대 순명하며 묵종하게 합니다. 신자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도록 세우기보다는 직분자의 말에 묵종하는 ‘맹신자’로 만드는 교황제는 복음의 풍요함을 앗아가는, 매우 괴악한 제도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목사나 장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직분들을 통해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엡 4:12) 하는 것으로서 성도로 하여금 그저 목사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이르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직분자는 그리스도께서 종으로서 구속의 일을 이루셨듯이 자신도 말씀의 식탁에서 주님의 종으로 봉사하여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해야 하는데 로마교회는 이 점에서 큰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개혁자들은 복음 강설이 교회에서 선포되도록 하려고 직분을 개혁하였고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주요한 과업이 되었습니다.
3) 종교개혁 - 직분의 회복과 복수 감독제
로마교회의 성직 계서제를 타파하는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재세례파나 회중교회는 외적인 제도의 개혁을 철저히 시행하려고 하면서 직분 자체를 경시하는 데에까지 나아갔지만, 개혁교회에서는 직분의 정당한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칼빈이 고대 교회의 ‘군주적 감독제’에 대하여 그 시대의 맥락에서 동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제도의 변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강설을 통하여 사람이 변화되는 것에 있었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의 직분자들이 함께 논의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교회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였습니다. 제네바에서 매주 금요일에 목사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서 교회적인 문제를 함께 결정하였고, 매주 목요일에는 치리회가 모여서 교회 안의 구체적인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이렇게 목사와 장로들이 모여서 논의하는 관행은 ‘노회’ 곧 ‘복수 감독 체제’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노회에 대한 이해가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와 영미 계통의 장로교회 사이에서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비교적 목사의 숫자가 많은 유럽 대륙에서는 지역 교회의 치리회를 중심으로 교회 정치를 시행하고 노회와 총회는 그러한 지역 교회들이 ‘교회 연합’으로 기능하면서 상호 감독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목사의 숫자가 적은 영국이나 스코틀랜드에서는 노회를 중심으로 교회 개척과 운영의 일을 시행하였습니다. 목사 임직의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개혁교회에서는 목사의 회원권이 지역 교회에 있지만 장로교회에서는 노회에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이것은 그 교회들이 처한 역사적인 현실에서 비롯한 것이고 대립적인 것은 아닙니다. 두 전통에서 모두 말씀을 전파하고 감독하는 직분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2. 독립개신교회의 감독제에 관하여

독립개신교회는 한 분 목사님의 복음 전파로 시작하였기에 ‘단수 감독제’의 정체를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복 주심으로 교회가 성장하고 여러 직분자들이 임명되었을 때에 ‘복수 감독제’로 정체를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는 일이고 또한 계속하여 목자장이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태도로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2009년에 개정된 헌장에서는 ‘복수 감독제’ 외에 주목할 부분이 한 군데 더 있습니다. 17조에 “의정회는 각 교회의 조직을 도와서 각 교회의 치리회가 독립하기를 권장한다”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것은 ‘복수 감독제’가 우리의 최종 목표가 아니고 각 교회에 치리회가 구성되어서 조금 더 ‘교회 연합’의 형태로 장성해 나아가기를 천명하는 것입니다. 의정회를 중심으로 헌장을 개정하는 그 날에 우리는 그다음 단계를 밝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기를 힘쓰면서 그 다음 단계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2009년 총회 때에 고(故) 최낙재 목사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강설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우리는 영광의 주님의 양 떼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독립개신교회는 헌장을 개정한 이후에도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힘있게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수 감독제 헌장으로 돌아가겠다’ 하고 선언하면서 ‘계승’의 기치를 내세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은 독립개신교회를 인도하는 주님의 손길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교회 역사를 빗대어 말하자면, 종교개혁의 밝음을 버리고 중세 교권주의자들의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목사들이 모두 강설에서 독립하여 주님의 말씀을 풍성히 전하려고 하는데 다시 일인 감독제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일이고, 주님의 지혜보다는 사람의 생각을 의지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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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과 오순절

[2008년 04월] 64호

논단

고대 교회와 로마 교회의 사순절

[2008년 04월] 64호

논단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바울 사도의 선교 편지 (1)

[2008년 06월] 65호

성경 강해

네덜란드 기독개혁교회와 독립개신교회가 자매 관계에 들어감

[2008년 06월] 65호

교회 소식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바울 사도의 선교 편지 (2)

[2008년 08월] 66호

성경 강해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 (1) -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 (1834년) ①

[2008년 09월] 67호

교회 소식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 (2) -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 (1834년) ②

[2008년 11월] 68호

교회 소식

2009년,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2009년 01월] 69호

논단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 (3) - ‘분리 또는 복귀’의 선언 (1834년) ③

[2009년 01월] 69호

교회 소식

제네바 시편 찬송에 대하여

[2009년 04월] 70호

논단

제네바 시편 찬송 서문과 칼빈의 찬송 신학 (I)-1542년 서문을 중심으로

[2009년 06월] 71호

논단

칼빈과 하이델베르크와 아펠도른-2009년에 독립개신교회를 찾아온 먼 나라의 이웃 교회들

[2009년 06월] 71호

교회 소식

제네바 시편 찬송 서문과 칼빈의 찬송 신학 (II) - 1543년 서문을 중심으로

[2009년 08월] 72호

논단

참된 교회적 사귐과 거짓 교회적 사귐 -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와의 사귐

[2009년 10월] 73호

교회 소식

독립개신교회 소개 (2009년)

[2009년 12월] 74호

교회 소식

하늘에서 내려 주신 성도의 사귐

[2009년 12월] 74호

성경 강해

독립개신교회의 신학 교육의 역사와 방향

[2010년 02월] 75호

교회 소식

고 최낙재 목사 추모사

[2010년 06월] 76호

교회 소식

칼빈의 개혁 활동과 제네바 학당

[2010년 06월] 76호

논단

어머니의 사명

[2010년 09월] 77호

교회 소식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신론과 신령하고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운 신자의 삶

[2010년 11월] 78호

논단

네덜란드 기독개혁교회 총회에 다녀와서

[2010년 12월] 79호

교회 소식

독립개신교회 소개(2010)

[2010년 12월] 79호

교회 소식

신학생과 나그네

[2011년 02월] 80호

논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성신론과 신령하고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운 신자의 삶 (II)

[2011년 02월] 80호

논단

두 가지 가정 예배

[2011년 12월] 83호

성경 강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리처드 개핀 교수의 방문

[2012년 05월] 84호

교회 소식

제2세대의 약점과 사명

[2010년 08월] 85호

논단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2013년 04월] 88호

논단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013년 10월] 90호

교회 소식

정통장로교회와 자매 관계에 들어가면서

[2014년 09월] 93호

교회 소식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을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되돌아봄 (1)

[2014년 09월] 93호

교회 소식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을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되돌아 봄 (2)

[2014년 12월] 94호

교회 소식

프란치스코의 한국 방문을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되돌아 봄(3)

[2015년 02월] 95호

교회 소식

분향단과 기도 - 그 위치와 의미

[2015년 05월] 96호

논단

사울과 다윗-사무엘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2016년 02월] 99호

논단

감독 제도와 개혁교회

[2016년 09월] 100호

논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