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에 정초에 뜨는 태양은 구랍(舊臘) 마지막 날에 뜬 것과 같은 것이지만 일자(日字)와 연한(年限)을 정하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닙니다. 특히 개혁교회나 장로교회에서는 2009년을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로 여깁니다. 1509년 7월 10일에 태어난 분의 탄생 500주년이 되기 때문입니다. 칼빈 선생의 반천년(半千年) 기념행사에 대한 소식이 여기저기에서 들립니다. 이미 2008년 여름부터 세계 각처의 신학 대학이나 일반 대학에서도 기념행사를 열고 있고, 그 행사를 알리는 홈페이지가 여럿 있습니다(calvin2009.com, calvin2009.net, calvijn2009.nl, calvin09.org 등). 어떤 홈페이지의 소식란을 보면 2008년 10월 31일에서 2009년 10월 31일까지 열리는 칼빈 기념행사가 무려 72건이나 등재되어 있습니다.¹⁾ 2009년은 가히 ‘칼빈의 해’(Calvin Year)라고 하겠습니다.

‘칼빈의 해’의 전야제로 2008년 종교개혁 기념일에 네덜란드 푸튼(Putten)에서 “성자인가, 죄인인가? 존 칼빈(1509-1564)의 개혁”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 대회가 열렸습니다. 10월 30일-11월 1일에 열린 그 학술 대회에서는 17명의 칼빈 연구자가 발표하였고 네 대륙에서 110명의 학자나 목사가 참석하였습니다. 마침 그 기간이 필자의 연구 휴가 기간이어서 거기에 참석하였습니다. 영어뿐 아니라 독일어와 프랑스어 발표가 통역이 없이도 부드럽게 진행되었고 이전 연구에 근거한 전문적인 논의가 전개되었습니다. 구약학을 공부하는 필자로서는 그 논의를 다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 학회에 대한 간략한 스케치와 소감은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번 학회의 주제, “성자인가, 죄인인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칼빈에 대한 평가는 상반됩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을 거의 ‘성자’의 수준에 올려놓고 이야기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죄인’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엄격한 신정(神政) 정치의 시행자,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킨 편협한 사람, 제네바의 교황 등으로 평가합니다. 이처럼 상반된 해석은 ‘칼빈’과 후대의 ‘칼빈주의자’를 동일시하면서 큰 주제들을 교리적으로만 다루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지난 세기 이후, 칼빈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한 교리적 연구에서 벗어나서 칼빈의 주석과 설교로 넓혀졌고, 이제는 서간문을 중심으로 칼빈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려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칼빈이 그 당시의 다른 개혁자들과 주고받은 서간들, 제네바 치리회의 치리 문서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를 통하여서 16세기 제네바에서 활동한 칼빈의 모습을 생생하게 제시합니다. 작은 것에 몰두하다가 큰 그림을 놓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좋은 방향의 발전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학회에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는 엘시 맥키 교수가 “영성의 개혁자로서 칼빈”이라는 주제로 기조 발표를 하였습니다. 맥키 교수는 칼빈의 ‘영성’은 중세의 미사적인 영성과 달리 성경 말씀과 강설에 근거한 영성이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회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미사와 성가대만의 찬송이 아니라 평민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회중이 찬송을 드리면서 예배에 참여하는 영성이었습니다. 특히 칼빈은 시편을 강해하는 데에 마음을 기울였고 회중은 시편을 강설로 배운 다음에 운율을 붙여서 불렀습니다. 말씀과 찬송으로 개혁된 예배가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습니다.

제네바 교회의 치리 혹은 권징은 세르베투스의 화형 사건 때문에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그 문제는 그 문제대로 16세기의 상황에서 다루어야겠지만 그것으로 제네바 교회의 권징과 치리를 대표하여서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입니다. 이번 학회 기간 동안에 7,190건의 수찬 정지(受餐停止)의 사례를 시기별로 분석한 글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글에서 치리회(=당회)의 권징은 목회적인 마음으로 해악을 방지하려는 것이었음을 충분한 자료에 근거하여서 설득력이 있게 제시하였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3계명을 말해 보시오”라는 장로의 질문에 대하여서 “성경에는 세 가지 계명만 있는데, 첫째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고 둘째는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이고 셋째는 ‘……’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에게는 성찬에 참여하지 말고 먼저 요리문답 반에서 공부하도록 권징을 하였습니다. 또한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나 싸움을 해결하고, 특히 그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권징의 26.7%를 차지함을 통계로 제시하였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치리회가 회중의 생활을 살피면서 권징을 행하였는데, 이것은 신앙고백에 근거한 교회 질서를 확립하려고 하면서 권징을 행한 것이고 공포감을 주는 권징이 아니었습니다.

학회에 참석하면서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습니다. 첫째는 ‘반가움’입니다. 『기독교 강요』와 『칼빈 주석』을 읽는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필자에게는 발표자들의 연구가 자극제가 되고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는 ‘아쉬움’입니다. 전문적인 발표를 다 따라가지 못하는 아쉬움만이 아니라 칼빈의 신앙을 계승하는 정신과 신앙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학회 기간 동안 두 차례 만찬이 있었습니다. 매우 고급스러운 음식이 제공되는 만찬이었는데 ‘기도의 시간’은 있었으나 함께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사회자가 “지금부터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하고 말하고 각자가 기도하였습니다. ‘아마 그 자리에 참석한 학자들 가운데는 신자가 아닌 사람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개혁 기념일인 10월 31일 저녁에는 음악회가 있었고, 연주자의 설명과 함께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멘델스존의 음악을 오르간 연주로 감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함께 찬송하지는 않았습니다.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기에 적합한 자리였지만 부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루터 학회가 아니고 칼빈 학회였다고 한다면 칼빈의 주도하에 완성된 제네바 시편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학회 기간 동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칼빈이 이 자리에 온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자기의 활동을 잘 제시한 것이라고 여길까?’ 이러한 생각이 떠오른 것은 칼빈의 유언 때문입니다. 칼빈은 자기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묻도록 하였고 묘비도 세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탄생 500년이 지난 오늘날, 그가 활동한 제네바에서는 기념행사들이 줄지어서 열릴 예정이고,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 로마 가톨릭 대학에서도 칼빈 탄생 500주년에 대한 기념행사를 합니다. 한국에서도 ‘한국칼빈학회’가 2009년 6월 21-22일까지 학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생각은 500주년 기념행사를 무조건 반대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기념하되,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기념이겠는가를 생각하다가 나온 것입니다. 칼빈이 활동하였던 제네바에 간다고 하여서 칼빈을 제대로 기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칼빈의 신앙을 이어받고서 어머니와 같은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칼빈의 진정한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아펠도른 신학대학에서 봉사 신학[실천 신학]을 가르치는 바르스(A. Baars) 교수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으로 700여 쪽에 이르는 박사 학위 논문을 썼는데, 사석에서 칼빈 연구자인 자기는 제네바에 가 보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덧붙여서 ‘나는 칼빈을 읽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제네바에는 칼빈의 신앙을 이어받은 개혁교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야 칼빈의 탄생을 기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릇된 동기에서 선지자의 비석을 세우려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참조. 마 23:29).

칼빈은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동시에 청종(聽從)하였습니다. 강설이 그의 사역의 기본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와 동일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주님, 나의 심장을 신속히 그리고 진지하게 바칩니다”는 태도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칼빈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칼빈을 하나님의 종으로 이해하면서 칼빈을 실제로 읽는 사람이 진정한 계승자일 것입니다. ‘나도 칼빈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2009년의 500주년을 제대로 기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후기. 성약출판사에서 나온 두 책을 소개합니다. 할세마 여사의 『이 사람, 존 칼빈』은 내용이 충실한 입문서로서 청소년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입니다. 파브르 교수의 『성신의 신학자, 존 칼빈』은 칼빈의 개혁을 신앙고백과 교회법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매우 뛰어난 책입니다. 입문서를 읽고 이 책을 마저 읽으면 칼빈의 저술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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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reformiert-info.de/side.php?news_id=2022&part_id=109&part3_id=105&navi=21. 2008년 12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