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하지(夏至) 며칠 지난 후 어느 날이었다. C는 아침 일찍 잠이 깨자 “오늘은 집을 떠나는 날이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는 이 집에서 이 침구를 갰다 폈다 하는 일이 없겠지.” 그는 덮고 잔 침구를 개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C는 오늘 밤차로 이 도시를 떠나서 내일 아침 부산에 도착하여 저녁에 그곳에서 떠나는 배로 중국 상해에 가려는 것이다.

C는 지난 3월에 이곳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을 하더라도 서울이나 일본 동경의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학자금이 없다는 것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어서 졸업 후 앞으로 어떻게 할까에 대한 제 생각을 아버지께 여쭙고, 그 가르치심을 받아 마침내 중국 상해(上海)행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손에 별로 가진 돈도 없이 정처 없이 집을 떠나려고 하니, 외롭기도 하고 또 제가 우러러보고 모시고 살아온 제 아버지의 슬하를 떠남에 슬픔도 느꼈다.

C의 아버지는 민족주의 사상이 강렬한 인사로서, 일찍이 기미(己未) 운동 때에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얼마 후 국내로 돌아와서 민족주의 계통의 어느 언론 기관에 취직하여 남부 일부 지대의 책임자로 지금 이 지방 도시에 살고 있다. C는 그러한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라왔다. 아버지는 그 직업 때문에 그렇기도 하거니와, 또한 그의 천성이 사람들과의 교제를 좋아하여 그 교제의 범위가 넓고 다채로웠다. C로서는 아버지의 실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지만, 밖에서 교제할 때에는 돈을 활수(滑手)있게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안 살림은 어려운 편이다. 이것은 모두 C 스스로의 짐작일 뿐이다. 아버지의 사회 활동을 C가 일일이 아는 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C가 고등 보통학교 졸업반에 진급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재정 상태에 관심이 깊었다. 졸업한 후에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지 여부를 좀 더 분명히 알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 지난 후에 C는 아버지의 형편에 대하여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유수한 언론 기관의 지사장(支社長)이다. 지방에서의 아버지의 일은 대체로 서울 본사의 계획대로 하는 일이다. 그런 일의 비용은 서울 본사가 지출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안 살림은 회사에서 지급하는 봉급에만 의존하고 회사 돈을 한 푼이라도 임시로 유용하시는 일이 없다. 이래서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

어느 때 C는 제가 졸업 후 혹시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을까를 확실히 알려고 그 일을 아버지에게 여쭈어 본 일이 있었다. 그 아버지의 대답을 요약해 보면, “네가 심신을 더 닦아서 장차 이 민족과 사회에 작은 봉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향상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좋다. 네가 더 장성하려고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느냐만,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너를 어디로 유학 보낼 수가 없구나. 나는 현재 민족을 위한 기관에서 작은 일이라도 맡아서 하는 것으로 나의 삶의 의미를 느끼는 터로서, 이런 일은 수입이 많지 않다 하여 직업을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생활은 정의를 구하고 전진 향상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은 험한 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방향을 바꿀 수가 없다. 그러한 내가 너의 진학을 얼마나 지탱해 줄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다…….”

C는 이전부터 자기 아버지를 높이 우러러 보았지만, 아버지의 확고한 신념의 말씀을 들으면서 제 아버지를 훌륭한 분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물질의 자산도 없고 빈한(貧寒)하지만, 그것이 그분의 주의(主義)와 신념에 충실한 생활 때문인 것을 알고, 아버지가 제 학자금을 대어 주지 못하여 제가 진학하지 못함을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아버지의 그 타협 없는 생활에 작은 흠이라도 내지 마시기를 빌었다.

C는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속히 집을 떠나려고 마음먹고 그 준비를 했다. 먼저 집을 떠나서 어디로 가려는가 그 목적지를 확정해야 했다. 할 수만 있으면 중국 상해로 가고 싶었다. 일찍이 아버지가 망명해 계시던 곳이다. C가 다른 곳보다도 중국 상해를 원하는 것은 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 듯했다.

바로 몇 달 전에 C가 들은 아버지의 말씀은 특별히 C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지금 너와 내가 발을 붙이고 있는 이 땅의 이 사회가 결코 우리들, 이 사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민족의 바른 활동과 전진 향상을 도와주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너도 잘 아는 일이겠지. 이러한 속에서 학교 졸업하고는 취직하고 좀 있다가는 혼인하고 자녀를 기르고, 이렇게 동풍묵수(東風墨守)하는 것을 은근히 기뻐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너는 알 것이다. 저희들의 복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은 사회 제도 아래서 저들의 명령에 절대로 복종하기를 강요하고 있는 터이다. 이런 압박에 눌린 많은 사람이 이 불공의한 현실을 잘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자들의 권력권 내에 있으면서 항거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즉시 이 압박자들에게서 잔인한 처치를 받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기 두어 달 전에 들은 아버지의 이런 말씀을 C는 때때로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 무렵 C에게는 자기 사정을 서로 이야기하는 친구가 두어 사람 있었다. 하나는 C의 학교 여러 해 선배로서, 그 학교 졸업 후에 바로 조그마한 상업을 시작한 사람이고, 또 하나는 C와 비슷한 나이의 친구로 학급은 서로 달랐으나, 학년과 학교는 같았다. 그와는 서로 생각과 관찰이 비슷해서 만나면 주고받는 이야기가 많았다.

C는 학교 선배인 친구를 찾아가서 졸업 후에 이 사회를 벗어나서 멀리 상해로 가려는 뜻을 고하고 그의 의견을 물었다. 이 선배의 사상 경향은 C의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C의 외유(外遊)의 뜻을 듣더니, “자네 같은, 훌륭하신 춘부장(椿府丈)의 정신을 받은 열혈한(熱血漢)이 이 현실의 되어가는 꼬락서니를 보고서 좌이대사(坐而待死)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이 땅을 떠나려는 자네를 만류할 까닭이 없네. 일본 위정자가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시켜서 이 땅의 농경지의 태반을 간계로 소유한 것은, 인구가 넘치는 일본으로서는 그저 이 나라 땅에서 나오는 곡식만을 노린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해 왔던 터라, 우리가 이 땅, 이 사회에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것도 한 가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왔네마는,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차지한 오늘날에는 일본으로서는 만주 경영이 더 크고 급한 문제일 것일세. 자네가 중국으로 가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지”라고 하였다.

며칠 전에 C의 아버지는 서울 본사에 다녀오더니, C에게 상해까지의 차 삯, 배 삯, 그리고 객지에서 우선 얼마 동안 쓸 비용을 주었다. 아마 본사에서 꾼 돈일 것이다. C의 학교 선배인 친구도 얼마 전에 C에게 전별금으로, 그 친구의 영세(零細)한 장사로 보아서는 힘에 넘치는 돈을 주었다.

수삼일 전, C는 또 하나의 친구 -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 의 집에 갔었다. 그 친구와 그의 부모에게 떠나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친구도 C와 함께 그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상급 학교에 진학할 아무 계획을 보인 일이 없던 것으로 보아, 아마 학비 마련의 길이 없어서 진학을 처음부터 생각지 아니한 모양이었다. 학교 졸업 후 C는 그 친구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때에 알게 된 것은 그 친구는 앞으로 일본 동경에 가서 고학(苦學)을 하려고 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먼저 자기가 쓰일 만한 그릇이 되도록 좀 더 연마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평소에 C가 그분을 만날 때마다 남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아주시는 분이라고 느끼게 했으며, C로서는 그러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 친구가 부러웠다. C의 어머니는 계모다. 10여 년 전에 C의 어머니가 별세한 후 2년쯤 뒤에 C의 아버지는 속현(續絃)을 했던 것이다. C의 계모가 덕이 없는 여성이 아니지만, C에게는 냉담했다. C가 이제 집을 떠나지만, 그 어머니는 별로 서운해 하는 빛은 없었다. 오히려 그 친구의 어머니가 돈 없이 외지로 멀리 가는 C를 걱정하는 터였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C가 사흘 후 저녁차로 떠난다는 것을 물어 알고서는 C더러 집에 와서 저녁이라도 먹고 떠나라고 간곡히 말하셨고, C도 거절할 수 없어서 저녁밥을 먹으러 오기로 약속하고 그 집에서 나왔다.

떠나는 날, C는 안방에 들어가서 부모와 함께 조반을 먹고 제 방에 돌아와서 가방 하나를 꾸렸다. 짐이라고는 세탁한 내의와 서너 권의 책이 전부다. C는 낮에는 장사하는 그 선배와 친구를 만나 같이 점심을 먹고 하오에 몇 군데 들러 일을 보고 저녁이 다 되어 친구의 집으로 가서 정성스럽게 차린 밥상을 대했다. C는 친구의 어머니의 권함에 따라 배불리 먹고 친구의 부모에게 각각 절을 하여 하직을 고한 후 친구와 함께 C의 집으로 왔다. 기차 떠날 시각에 맞춰 C는 집을 떠나고자 먼저 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다음에 어머니에게 절을 했다. 두 어린 누이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일어나 가방을 들고 친구와 함께 집을 나셨다.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가 자전거로 오셨고, 또 그 선배 친구도 나왔다.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떠나는 길이라 아버지와 C의 두 친구 외에는 전송객이 없었다. 이것이 C에게는 고국을 떠나는 길이지만, 아직 발로 밟고 서 있는 땅이 고국 땅이라서 그런지, 별로 고국을 떠난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C가 탄 기차가 움직일 때 기차 승차대에 계시던 아버지와 그 곁에 서 있는 두 친구에게 기차 입구 발판에 서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더니, 두 친구도 고개 숙여 답례하고서 한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아버지는 C를 주목하실 뿐 아무 말 없으셨다.

차내로 들어온 C는 제자리에 앉아서 아버지를 생각했다. C가 아버지에 대하여 깨달은 것은, 민족주의자요 왜경의 요시찰인(要視察人)인 그분의 앞날에, 시국의 급박에 따라, 어떤 고난이 올는지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아마 아버지도 그것을 느끼는 까닭에 아들이 하루속히 독립해서 자기 길을 홀로 걷게 되기를 바라셨을 것이다. C는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잠을 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