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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96호

 

누가 나에게 세레나데를 불러 줄까? - 혼인, 가정과 교회를 읽고 -
문정효(文靖曉)  

 

살랑이는 향기 가득한, 바람이 부드러운 봄밤, 발코니 아래에서 들려오는 연인이 부르는 세레나데. 그것은 이미 실력의 고저와는 상관이 없다. 상상만으로도 내 마음은 환희로 가득하다. 한 여인은 결혼기념일에 단번의 연주 이상의 아름다운 음악, 그 자체를 선물 받았다.

Aleksandr Borodin, String Quartet No.2 in D Mov.3 “Nocturne”

음악의 역사를 돌아보면 종교 음악을 제외하고 세속 음악 중에서는 사랑 노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중 내가 추천하는 사랑 노래는 보로딘이 작곡한 <현악 사중주 2번 라장조의 3악장 녹턴>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수많은 가곡들이나 오페라 아리아와 같이 의미 전달이 비교적 쉬운 성악곡도 있으나 의미 전달이 어려운 기악 음악이면서 문학적 텍스트를 찾기 어려운 절대 음악인 <녹턴>을 굳이 골랐다. 기악 전공이라 기악곡에 대하여 더 자신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이 음악에는 분명히 아름답고 헌신적인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녹턴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곡은 보로딘이 자신의 아내에게 헌정한 사랑의 멜로디이다. 이 곡의 중심 멜로디는 첼로와 제1바이올린의 선율 교환으로 이루어진다. 주고받는 선율은 연인들의 대화를 묘사하는데 듣는 순간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이 음악의 선물을 받은 주인공은 예카테리나 프로토포포바이다. 러시아 5인조의 가장 연장자인 보로딘의 아내이며 피아니스트였는데 안타깝게도 결핵 환자이었다. 러시아 5인조의 다른 멤버들도 그렇듯 보로딘은 음악가 이외의 본직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러시아의 자랑스러운 화학자이며 의사였다. 보로딘은 예카테리나를 환자로서 만났음에도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와 결혼을 했다. 온전한 두 사람으로도 이루기 힘든 가정을 보로딘은 병약한 예카테리나와 입양한 두 아이로 이루었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알게 모르게 사람이 어둡기 마련이나 그가 쓴 곡에서는 아름다움과 평안함이 주로 나타난다. <녹턴>뿐 아니라 보로딘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 혹은 오페라 이고르 공 중 <폴로베츠인의 춤>에서도 고뇌나 우울함보다 희망이나 생기가 느껴진다. 보로딘은 매일 바쁜 일정 때문에 곡을 쓰기가 어려웠는데 반대로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는 아내를 보며 부럽다고 했다. 마치 아내의 병을 불행한 상황이 아니라 누구라도 겪는 일상으로 여기는 듯한, 범상치 않은 발언이다.

 

이 둘의 사랑은 단순히 보로딘의 헌신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자의 가족의 고생은 무시할 수 없지만 가장 힘든 것은 환자이기 때문이다. 예카테리나 또한 의학이 무섭게 발전한 오늘날에도 자칫 죽음에 이르는 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그 불편함과 고통을 인내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일방적인 헌신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와 오래 참음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의 이러한 사랑은 무거운 현실을 청승이 아닌 <녹턴>의 달콤함으로 승화시켰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본성적으로 마음에 하나님께 속한 사랑을 가지고 있다. 요즘 세상이 아무리 타락했다고는 하나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선’(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선은 아닐지라도)이겠다. 그러므로 보로딘과 예카테리나의 사랑은 분명 이 시대에서도 통하는 감동이다. 아픈 아내에 대한 보로딘의 극진함은 칭찬 받을 만하며 <타임즈>에 또 다른 ‘영웅’(혼인, 가정과 교회, p.200)으로 실려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에서는 ‘오래 참음’과 ‘온유함’이 보인다. 보로딘과 그의 아내가 그리스도인이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사랑에 대하여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위대한 사랑을 하나도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무리한 판단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자가 아니더라도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 잘못을 찾을 만한 저급한 사랑이 아니고 선하게 보이는 사랑으로 - 그 가운데 있어야 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올바른 사랑을 나타내는 혼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혼인은 홀로 온전하시면서 삼위이신, 단일복수형인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나타낸다. 부부사이에서만, 독특하게 ‘나’이면서 ‘우리’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남편과 아내의 관계의 원형은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아내는 주께 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며 남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는 것과 같이 아내는 남편을 머리로 두고 섬기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내어 주신 것과 같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 것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혼인을 하여 둘이 하나를 이룸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게 되지만 혼인 그 자체로 완성은 아니다. 혼인하는 것으로 둘이 하나를 이루어 하나의 사명을 깨닫고 같은 목표를 향하여 비로소 전진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자녀를 주시면 자녀와 함께 가정을 이루어 교회의 건실한 핵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내용은 마치 부드러운 밥알에 섞인 까슬까슬한 쌀겨처럼 내가 혼인의 심오함을 모두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함을 고백하게 한다. 그러나 부족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혼인 제도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선한 뜻을 깨닫고 그 좋은 것에 내가 참여하기를 바란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목사님께서 성찬의 빵이나 포도주를 먹고 싶지 않느냐 하시며 물어보신 일이 있다. 마음에는 당연히 먹고 싶으면서도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정답인 줄 알고 먹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어렸음에도 이미 나는 솔직하지 못하고 계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어린아이라도 성찬 예식을 보며 장차 그 자리에서 먹고 마시게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때는 단순히 내 생각과 반대로 대답이 나와서 기억을 하고 있지만 지금은 순진하게 그 자리에 참여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생각한다. 물론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나도 하고 싶다’ 정도의 생각에 머문다면 큰 문제가 있겠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지금의 나는 어린아이가 단순히 빵을 먹고 싶은 수준으로 혼인에 대하여 소원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내용을 깨닫고 또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드라마에서 보면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 하는 여자가 ‘내가 왜 좋아?’ 하고 묻고는 한다. 그러면 남자는 ‘몰라’, ‘그냥’, ‘다’, 혹은 ‘너니까.’ 이런 대답을 한다. ‘그 사람 어디가 좋아?’ 연애를 막 시작한 친구에게 물어보면 ‘착해’, ‘잘생겼어’, ‘돈이 많아’와 같은 말들이 나온다. 보로딘에게 예카테리나의 무엇을 보고 사랑하게 되었는가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둘 다 음악가이기 때문에 음악적 감성이 지극히 공감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었을 수 있겠다고 추측해 본다. 아니면 단순히 예카테리나의 용모가 아름다웠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추구하는 조건을 서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 여자(혹은 남자)들에게 조건을 따라 결혼한다고 비난하지만 조건은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들을 비난하고자 한다면 조건을 따진다는 점이 아니라 무엇을 조건으로 두는가를 지적해야 한다. 사람을 볼 때 외모나 재력, 사회적 위치와 같은 대놓고 속물적인 조건 말고 성품이나 가치관 혹은 인생관을 중요시할지라도 그것은 배우자를 고르는 첫 번째 조건이 될 수 없다. 혼인할 배우자는 먼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은 기본이면서 어길 수 없는 명백한 조항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의 도리를 바르게 깨닫고 나아갈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았다는 점이 전제적인 조건입니다. ······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덮어놓고 혼인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다음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명에 대한 자기 각성이 생겨야 합니다.”(혼인, 가정과 교회, p.310-311)

신자의 혼인에 대해 생각하면 심오하고 어려워서 ‘그렇게 살면 뭐가 재밌니?’ 할 만하다. 혼인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우선으로 두기 때문에 재미는 챙기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명을 이루어 나가는 자에게 세상이 주는 재미보다 더 고귀한 것으로 주실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혼인할 조건을 맞추어 보겠다고 내가 형제를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다른 누가 아니라 내가 그렇듯,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여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 만일 첫 사람인 아담을 내 앞에 데려와도 내가 과연 만족을 하겠는가? 아는 만치 보인다고, 상대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의 귀함을 알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그가 가진 결핍이 내가 순종해야 하는 남편으로 봐줄 만한 정도가 되는지 못되는지 저울질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나와 함께 사명을 이루어 나갈 배우자로 주셨다면 내게 주신 것이 가장 좋은 줄로 알아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별할 힘을 주시기를 기도한다.

벚꽃 색 달빛이 내리는 밤, 발코니에 나가 선다. 자, 이제 누가 나에게 세레나데를 불러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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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5월] 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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