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난쟁이’

이 표현은 중세 신학자 베르나르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개핀 교수의 스승이며 동료였던 변증학자 코넬리어스 반틸(Cornelius Van Til) 박사가 즐겨 썼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는 높이 되신 주님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허락하신 위대한 종들이 성신의 인도를 좇아서 쌓아 놓은 성과 위에 올라서서 이전의 거인들보다 더 멀리 바라보며 주님의 교회가 그리스도께로 자라가는 일에 이바지하려는, 겸손하면서도 진취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아마 개핀 교수가 주저(主著) 『부활과 구속』(Resurrection and Redemption)을 프린스턴의 성경 신학 교수인 보스 박사와 웨스트민스터의 조직 신학 교수인 머레이 박사에게 헌정할 때에도 동일한 태도를 취했으리라 짐작하는데, 이번에 개혁 신앙 강좌 7권으로 나온 그의 글 모음에서도 그 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살려 주는 영이신 부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신

이 책에는 강설, 짧은 에세이, 신학 논문, 취임 연설문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모든 날 마지막에 - 안식․종말․성신에 대한 성경 신학적 교훈”이란 적절한 제목에서 보듯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찬찬히 읽어 보면, 장(章)마다, 아니 페이지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성신이 되셨다’(고전 15:45)는 바울 사도의 위대한 선포가 아름다운 변주(變奏)들로서 울려 퍼지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습니다.

제1장에서 저자는 교회의 선교 사명에 관하여 강설하면서, 이 사명의 근거나 목적이나 추진력이나 범위 모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시고 교회의 머리로서 지금 만물을 통치하시는 사실에 달려 있음을 힘주어 전합니다. 제2장에서는 새 언약의 안식일에 관하여 귀중한 교훈을 제시하면서, 예수님의 부활과 현재적 통치를 전합니다. 제3장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신 사실에 담긴 중대한 의미에 우리 눈을 향하게 합니다. 제4-6장에서는 성신론과 그와 관련된 현실 문제들이 높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에 도달한 구속사의 관점에서 철저히 고찰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성경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라는 제하에, 살려 주는 성신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성취하신 구원을 자기의 영이신 성신을 통하여 교회와 신자 안에 어떻게 적용하시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 선포에는 웅장한 구속사적 조망이 담겨 있습니다.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는 성신이 되시사 성신님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교회와 신자에 내주하게 하심으로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역사 가운데 이미 들어와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세계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를 중심으로 그 완성을 향하여 실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점에 도달한 구속사의 이 웅장한 현장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광활한 통치로 우리의 눈을 향하게 하려는 듯합니다.

성경 신학과 조직 신학의 조화

저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찰스 크라헤 석좌 교수로 봉직중인데, 해당 교수좌의 명칭이 성경 및 조직 신학 교수(Professor of Biblical and Systematic Theology)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성경 신학과 조직 신학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아마 성경 신학이 조직 신학의 약점을 비판하고 등장한 학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 신학자들이 보기에, 조직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교리의 증거 본문(proof-text)으로 보고서 교리 설명을 위한 수단처럼 삼고 성경 본문을 문맥과 상관없이 인용함으로써 성경 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약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반면에 성경 신학은 성경 계시의 통일성을 약하게 만드는 위험스런 경향을 드러냈습니다. 성경 저자의 특징을 잘 드러내려는 것은 이해되지만, 성경을 마치 여러 신학자들의 글 모음같이 보이도록 만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가 “개혁파 성경 신학의 아버지”라 부르는 게르할더스 보스는 개혁 신학의 전통 위에 굳건히 서면서 성경 신학을 수립하였습니다. 그는 성경 계시의 역사적, 유기적 성격을 포착하고 성경 계시가 하나님의 구속과 함께 역사 속에서 유기적으로 발전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절정에 이르는 사실을 통찰력 있게 제시하였습니다. 특히 그분의 대작 『바울의 종말론』은 개핀 교수의 박사 논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임 조직 신학 교수인 존 머레이는 보스 박사의 연구 결과 위에서 성경 신학과 조직 신학의 조화를 꾀하였습니다. 그 좋은 예를 들면, 그가 성실한 주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의 근거로서 포착하면서 구원의 역사(historia salutis) 위에서 구원의 서정(序程)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일입니다.

저자는 특히 그의 박사 논문에서 보스 박사와 머레이 교수의 어깨 위에 올라가 좀 더 멀리 바라보려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활로써 성신과 경륜적으로 하나 되심에 관한 보스 박사의 개척적인 연구를 바탕 삼고 조직 신학과 성경 신학의 조화를 시도한 머레이의 시도를 뒤이어서, 구원론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논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모든 신자의 부활의 첫 열매이며, 따라서 둘째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 되신 분이시고, 그러므로 셋째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이 우리의 칭의와 성화와 양자(養子) 됨의 근거이며,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덕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시려고 성신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조직 신학과 성경 신학의 유기적인 결합을 추구하는 태도는 개핀 교수의 강의에서도 확연히 나타납니다. 조직 신학 과목이지만, 그는 항상 영어 성경과 함께 헬라어 신약 성경을 가지고 와서, 끊임없이 성경을 인용하고 철저한 성경 주해 위에서 교리를 설명합니다. 강의를 듣다 보면, 조직 신학 시간인지 성경 신학 시간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철저하고 풍부한 성경 주해 위에서 교리가 설명됩니다.

신학과 신앙고백의 조화

특히 제7장 취임 연설에서 잘 보여 주듯이, 저자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가 ‘교회를 위한 신학’에 기여하려 합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보스 박사의 성경 신학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설득력 있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 신학은 성경 계시가 제시하는 구속 역사, 곧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성취된 구속을 강조하는 반면,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은 구원의 역사보다는 구원의 서정을 강조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런 차이점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저자는 개혁 신앙의 전통에서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서정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고 구원의 역사 위에서 구원의 서정을 설명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특별히 개혁자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비롯해서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를 철저히 살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칼빈 선생의 구원론의 핵심이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그 핵심이 또한 보스 박사의 성경 신학의 골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줍니다.

여기서 소극적으로는 “한편으로 바울과 칼빈,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 신학 사이에 차별성이 불필요하게 확대”되는 것을 막고, 적극적으로는 높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성신과 말씀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시는 일에 종으로서 봉사하려는 저자의 교회적 관심이 잘 드러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믿는 일에 하나를 이루고 한 온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에 이르게 하려고 일하고 계십니다. 교회와 신자라면 마땅히 성신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 신학

그러므로 저자의 이런 교회적 관심을 생각할 때, 신학자의 짧은 글 모음에 두 편의 강설이 실린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습니다. 두 편의 강설에서 개핀 목사님은, 주님의 교회와 신자라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분으로서 명하시는 명령을 어떻게든지 이루고 나가야 하리라는 신성한 각오를 불러일으키고, 하늘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절박한 상태에 있는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품게 합니다. 강변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 교인들과 담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현 시대의 교회가 복음에서 멀어지는 현실 앞에서 주님의 교회답게 건전하게 서 나가기 위하여 필요한 일들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데서도 목사로서 주님의 교회를 염려하는 저자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방언이나 은사 운동과 관련된 교회의 현안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데서는 물론이고, 학술 논문에서 지극히 전문적인 주제를 다룰 때에도 교회의 현실과 유익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책에 실린 어떤 글들은 대단히 치밀하고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높이 되신 주님께서 성신과 말씀으로 주님의 교회를 세워 나가시는 일에 봉사하려는 저자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유익하고 즐거운 글 읽기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 리처드 개핀 2세는 미국 정통장로교회(OPC)의 목사이며,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성경 및 조직 신학의 찰스 크라헤 석좌 교수’ 로 봉직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